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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를 지켜낸 곳,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포천 반월성 여행/가볼만한 곳

by goosio 2020.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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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를 지켜낸 곳,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포천 반월성 여행/가볼만한 곳

 

군내면 구읍리 면사무소 앞에 위치한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곳이 있다?

포천의 관아가 있던 곳 뒷산에 위치한….반월성이라는 곳이 있다.

반월성은 사적 제 403호로 지정되었으며, 포천의 반월성은 반월이란 이름에서 예상해 볼 수 있듯이 청성산의 능선을 따라서 반달 모

양으로 성벽을 쌓은 산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반월성을 가는 길은 시멘트로 잘 포장이 되어있기 때문에 걸어서 방문하기에는 아주 최적화 되어있다. 그래도 운동화를 신고 방문하는것을 추천 드립니다 남쪽에 있는 문 입구에는 큰 느티나무 세 그루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나무들은 마치 반월성의 역사가 그대로 나타나는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나무 앞에 있는 안내글을 읽어보니 대략 400년정도? 된 나무들이라고 한다.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본다면….대략 조선 인조? 정도의 시대가 아닌가싶다. 반월성을 둘러보는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성벽의 상태가 매우 훌륭했다. 주위 마을 주민들이 만들어놓은 벤치와 성 안쪽 곳곳에 심어 놓은 매실나무 또한 매우 인상깊었다.

이렇게 문화재를 관리하고 보관하는 모습이 매우 잘되어있으면 그렇게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모습들을 보는 이들을 매우 흐뭇하게 만들기도 한다. 성벽 윗쪽의 산책로에서는 커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산책로에서 바라보는 시내의 경치는 말로 표한하기 힘들정도였다.

반월성 남쪽에 위치한 곳곳들은 아직 복원이 덜 된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동쪽에서부터 서쪽까지는 이미 어느정도는 복원이 마무리가 되어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문의 경우는 그냥 일반적으로 오를 수 없는 곳이었다. 이곳은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갈 수 있는 곳으로 확인 되었다. 또한 동문 뒷편에 위치한 건물터는 성내 매우 중요했던 시설들이 위치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청성산의 정상에는 장대터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여기는 장수 군사들이 지휘하던 장소로 추정된다.

지난 1990년대부터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치성에 위치한 4, 망대터와 장대에 위치한 2, 건물이 위치한 공간과 우물로 되어진 공간이 많이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 마홀수해공구단 이라 적혀진 기화가 발견되어 이는 삼국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마홀군이 포천이라는 사실이 어느정도 확인되었다. 또한 200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발굴 조사에서는 신라시대에 사용하던 토기와 백제 시대에 사용했던 토기들이 많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는 백제가 먼저 축성해 4세기까지 사용하였으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에 의해 고구려의 영토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진흥왕이 재위할때까지 신라가 한강 유역을 모두 장학하면서 반월성은 신라의 북진정책의 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길고 긴 시기를 지나 신라는 고구려에 위치한 낭비성으로 추측되는 반월성을 독차지하면서 한강 이북을 마음대로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신라는 한강 이북을 방어하기 위해서 백제가 이전에 축조했던 산성을 다시 재정비하여 모든 상황을 대비하기도 하였다. 그 시기에 맞춰 반월성 또한 재정비를 진행하였다고 한다.

반월성은 9세기 이전까지 두 차례정도의 재정비를 진행했다. 이때 반월성은 북방을 방어하는 전략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기 보다는 행정소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반월성이 다시 전략적인 가치로 빛나던 순간이 온다. 타 지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날쯤, 신라 조정에 대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포천은 태조왕건으로 유명해진 궁예가 철원 중심으로 태봉을 설립하면서 궁예의 밑에서 업무를 보게 된다. 포천에는 궁예와 왕건과 관련된 이야기, 문화재, 유적지 등이 매우 많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고려가 개성을 도읍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반월성은 전략적 기지로서의 역할, 느낌등을 잃게 된다. 이때문인지 고려 시대에서는 반월성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아마추측하건데 방어 시설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추측들로 인해 학계에서는 아마 이 시기의 반월성은 그저 민간 싱앙의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다.

조선시대 초기의 포천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여기는 한양으로 가는 매우 중요한 교통로로 알려졌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침략에 대한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반월성은 다시 한번 주목받게 되는데 이전과의 성격과는 다르게 군사 요충지로 주목받게 된다. 반월성은 여태 다양한 형태의 지역으로 주목받아왔다. 그 이유인 즉슨 그만큼 포천 반월성은 지리적으로 보나, 전략적으로 보나 매우 중요한 곳에 위치한 장소로 볼 수 있다.

 

여태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본다면, 포천에 위치한 반월산은 백제가 축조하여 4세기까지 고구려의 방어선으로 최적화 된 장소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의 영토로 들어가게 되면서 고규려의 건축물들이 하나둘씩 세워지게 되었고,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마홀군이 명시된 기와가 제작되었음을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진흥왕 이후에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반월산성이라는곳은 신라가 발전하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한 고려시대에서는 반월성의 사용 용도 및 빈도수가 삼국시대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개경과 꽤 거리가 있는 포천 일대의 전략적 중요성 또한 이전보다는 많이 줄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고려시대 반월성은 민간 신앙이 행해지던 장소로 예상된다. 특히 애기당에서 발견된 다양한 물품들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이곳에서 제사 및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반월성의 경우는 전망이 매우 뛰어나고 복원도 매우 잘 이루어진 사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점을 뽑자면 역사에 대한 정보 및 정확한 펙트가 다른 사적에 비해 부족하다는 점이다. 2천년의 역사를 간직해온 반월성이라 더욱 아쉬운 역사로 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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